제작 노트
제작 노트 5 ·

서툰 목수가 연장 탓을 하던 날들

4편이 그림 속에 무엇을 넣을지 고른 이야기라면, 이 글은 그것을 실제로 그려 내려다 부딪힌 이야기입니다.

그림을 층으로 쌓으려 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이미지를 여러 층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월지에 따라 한지 바탕의 색을 달리하고, 주 물상은 신강·신약에 따라 위치와 크기를 달리하고, 시지에 따라 필터 효과로 시간대를 입혀 다양하게 변주하려고 했습니다. 같은 소나무라도 어느 달, 어느 시에 태어났는지에 따라 다른 그림이 되도록요.

그러려면 확대해도 깨지지 않고 층으로 나눌 수 있는 벡터 그림, SVG 파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벡터 그림을 만들어 주는 리크래프트(Recraft)를 쓰게 되었습니다. 화선지에 번진 수묵화는 색이 하나이니 층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리라 보았습니다.

수묵은 한 가지 색이라 될 줄 알았습니다

주제가 뚜렷하고 옛 그림에서 자주 보던 물상은 그럭저럭 나왔습니다. 그 밖에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조후에 따라 조명을 준 듯 명암을 다루는 건 효과가 미미했고, 실제 기기의 브라우저에 올려 보면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층을 나누지 않은 한 장짜리 그림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작업 지시서를 다시 보면 프롬프트는 이상적이었습니다. 유전의 불꽃도, 콘크리트 댐도, 수력발전소도 문장 끝은 모두 "김홍도풍 조선 수묵화"였습니다. 김홍도에게 유전 시추공을 그려 달라고 한 셈입니다. 갑진에는 "안개 낀 절벽에서 자라는 전나무"를 주문했는데 소나무가 왔습니다. 한낮의 병오에는 "천정에서 아래로 곧게 쏟아지는 햇살"을 주문했더니, 고지식한 프로그램이 우주선 같은 병화를 그려 왔습니다.

한낮의 해에서 빛줄기가 아래로 뻗은 그림
"화면 위쪽에서 이글거리는 한낮의 해, 곧게 아래로 쏟아지는 빛줄기"를 주문한 병오. 빛줄기가 발사대 불꽃처럼 나왔습니다.

단일 레이어로 만들 것이었다면 화풍이라도 다양하게, 미드저니(Midjourney)가 더 맞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정말 서툰 목수가 연장 탓만 하는 셈이었습니다.

김유신묘 신상을 주문했더니

민화 모드의 열두 띠 그림은 신라 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동물 캐릭터가 아니라 신격화된 수호신으로, 파스텔 담채에 단청은 작은 장식에만. 지시서 끝에는 "만화 같은 느낌 금지, 굵은 윤곽선 금지, 불투명한 단색 면 금지"까지 적어 두었습니다. 지장간의 오행 색상도 현대 미술 자료까지 모아 반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부적과 코믹 카툰 사이를 오갔고, 여느 게임 안내 화면의 삽화처럼 나오기도 했습니다. 금지해 둔 굵은 윤곽선과 불투명한 면이 그대로였습니다.

한복 차림의 용, 호랑이, 쥐, 소, 말을 색 바탕 위에 나란히 그린 다섯 칸 그림붉은 판화로 찍은 부적 같은 그림, 가운데 말과 신상들
월지 바탕·일간 몸색·지장간 옷 색까지 넣어 본 다섯 칸(위)과, 부적처럼 나온 판화(아래). 그림 속 글씨도 프로그램이 그려 넣은 것입니다.

반대로 너무 잘 그려서 탈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프롬프트를 곧이곧대로 옮긴 고화질 프로그램은 '용 식상?' 하고 되묻고 싶은 그림을 내놓았습니다.

책을 든 선비 앞에 용이 고개를 숙인 그림
프롬프트를 곧이곧대로 옮긴 고화질 프로그램이 내놓은 초안.

처음에는 열두 동물을 계절 넷으로 곱한 48장만 그리고, 몸 색과 옷은 화면에서 덧입히려 했습니다. 지금 민화는 열두 동물과 다섯 가지 옷차림을 곱한 60장이 저마다 한 장의 완성된 그림입니다. 그나마 다른 손길을 거친 칠보공예 이미지에서 그 색이 구현된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마천루까지는 좋았습니다

현대 도시의 물상에는 멋진 청사진을 떠올렸습니다. 이것도 갑목 같은 마천루까지였습니다. 섬세한 물상의 상상도는 제작자의 초보 수준에 스스로 실망하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올려다본 마천루를 푸른 선으로 그린 청사진 스케치
그나마 마음에 든 갑목의 마천루 청사진.

지금 화면에 나오는 그림들은 그 서툰 목수가 부끄러워하며 깎아 낸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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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비스가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그날의 그림 이야기와 작동 방식에, 화면에 나오는 말들은 용어집에 적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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