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노트
제작 노트 3 ·

갈팡질팡처럼 보여도 줄거리는 있습니다

이 서비스를 만든 동기는 갈팡질팡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여 준다더니 옛 시가 나오고, 사주를 본다더니 주역 괘가 뜹니다. 그래도 줄거리는 있어서, 차례대로 적어 봅니다.

물상도에서 시작했습니다

원래 구상은 수업에서 나왔습니다. 동영상 강의를 듣다가,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와 예시로 든 사주 물상도를 보았습니다. 이것을 더 다양하게, 사람마다 다르게, 여러 화풍으로 보여 주는 일이 요즘 AI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처음 적어 둔 그림은 지금보다 훨씬 소박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 타로집 앞을 무심히 지나는 사람에게도 날씨 예보처럼, 건강검진표처럼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건강검진표도 일단 맨 앞장의 "당신은 당분간 정상입니다"를 보고, 원할 때 비로소 각종 수치가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넘겨 보니까요. 그래서 간결한 그림 한 장과 한 줄짜리 시 같은 문구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인의 음식을 밀키트에 담아 집에서도 맛보게 하는 셈입니다.

생일을 넣으면 블랙박스를 거쳐 짜잔 하고 그림이 나오는 대신, 내 생일이 이런 색깔의 레고 블록으로 짜여 있으니 이런 그림이 나오겠구나 하고 함께 짐작해 보는 재미도 넣고 싶었습니다. 그림을 그대로 받아 가도 되고, 아쉬우면 부족한 기운에 해당하는 작은 그림을 스스로 골라 얹을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밀키트에 계란 하나를 직접 풀어 넣게 하면 자기가 요리했다고 느낀다던데, 본인이 고르는 것이 묘미 아닐까 싶었습니다.

첫 설계 문서의 화면 흐름 일곱 단계: 초대장, 생년월일시 입력, 레고블럭 펼치기, 한 줄 맞이 문구, 이미지와 화풍 선택, 용신 안내와 아이콘 선택, 저장
첫 설계 문서에 적었던 화면 흐름 일곱 단계.

계산도 해 봤습니다. 열 개의 천간에 계절과 그 사이 환절기, 새벽부터 밤까지 여섯 시간대를 곱하니 기본 그림만 480여 장이었습니다. 여기에 수묵화, 벽화, 이중섭이나 고흐 같은 화풍을 네다섯 가지 얹으면 사람마다 충분히 다르게 느껴지리라 여겼습니다.

그림은 준비해 두기로 했습니다

이왕이면 여러 표현 양식을 넣으려다 API 비용을 현실적으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만들어 보니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고, AI 안에 한국적인 자료가 모자라서인지 결과물의 편차가 매우 심했습니다. 실망하고 계획을 고쳤습니다. 타로 카드처럼, 준비된 그림을 내어 주기로 했습니다.

화풍을 고르게 하는 계획도 바뀌었습니다. 화풍 선택이 애매할 만큼 갈래가 많지 않다면, 차라리 카드의 계열마다 화풍을 하나씩 맡기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드마다 산수화, 민화, 판화, 청사진이 각각 한 가지 결을 맡습니다. 480여 장을 그리려던 산수화는 여든세 장이 되었습니다.

문장도 준비해 두기로 했습니다

그림을 준비해 둔 뒤에도 풀이 문장만은 AI가 그때그때 쓰게 하려 했습니다. 화풍에 맞춰 다큐 내레이션, 일인칭 소설, 어르신의 상담 말투, 그리고 오랜 풍경에서 벗어난 현대와 근미래 도시의 묘사로 짝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AI에게 맡길 지시문을 짜다 보니 정작 들려줄 목소리가 없었습니다. 시험 계획을 짜느라 피곤한 것을 시험공부를 했다고 착각하기 쉬운 때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명식을 놓고 네 가지 말투로 직접 써 보았습니다. 쓰다 보니 이게 프롬프트를 정하는 과정인지 소설 습작인지 싶었습니다. 어르신 말투는 깊이 있고 살짝 위트 있는 모습을 떠올렸는데, 너무 말이 많고 잔망스러운 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한 줄은 남았습니다.

"원래 땡여름에도 땅속 우물물은 손이 시리거든, 지열이 늦게 달궈져 오히려 겨울에 우물물이 따숩다고."

도시 묘사는 다큐를 염두에 두었는데 근미래 SF 소설처럼 되었습니다.

"아스팔트 가득한 이곳은 그랜드캐년의 계곡처럼 늘어선 빌딩 사이로 낮이라 해도 야외 활동이 활발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대신 지하에 자리 잡은 지열 발전 시설을 기반으로 물류가 유통되고, 실내에 구석구석 자리 잡은 초록빛 식물이 있어 새삼 이곳이 지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 네 편이 목소리 샘플이 되었습니다. 목소리 일부를 들려주고 그 사람 목소리로 인터뷰 영상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번에는 접속 환경이나 시간대에 따라 톤도 분량도 널을 뛰었습니다. 그림이야 시도한 이가 많지 않아 생경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똑똑한 이들이 드글드글한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정제된 문장을 통일감 있게 만들어 내는 일은 의구심만 가득한 여정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 말투의 풀이도 미리 써서 다듬어 두었습니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문장은 열 때마다 새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옛 책을 끌어왔습니다

그때 따로 재미 삼아 보던 초씨역림의 권위를 끌어오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쓰려고 만들어 둔 작괘 계산이 있었고, 번역기와 검색창을 한 줄씩 돌려 보던 조문 번역이 있었습니다. 뜻밖의 대장정이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 이야기는 앞 노트에 따로 적었습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

그렇게 만세력과 첫 화면에 한 달, 그림에 두 달, 조문 번역에 석 달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조립하고 배포하는 단계입니다. 번역은 생각보다 방대했습니다. 그래도 AI와 함께 출판사가 할 만한 크기의 일을 해 나가고 지켜보는 과정은 놀라움과 즐거움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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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비스가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그날의 그림 이야기와 작동 방식에, 화면에 나오는 말들은 용어집에 적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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